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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별쌤 최태성의 안내로 만나는 특별한 이야기! 역사 속 재난사건을 통해 안전의 중요성을 알려드립니다.더보기
우리나라의 국보 1호, 바로 숭례문입니다.
우리 민족과 늘 함께해 온 숭례문의 역사를 통해소중한 우리 문화재의 가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봐요~
영상대본
안녕하세요. 역사 속 재난 사건을 통해 안전 의식의 중요성을 알려드릴 큰별샘 최태성입니다. 오늘은 재난 극복을 통해 발견한 ‘문화재의 가치’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바로 숭례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죠. 숭례문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숭례문이 태어난 때는 조선 개국 초기인 1398년. 태조는 수도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성벽을 쌓고 사방으로 네 개의 대문을 세우지요. 숭례문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태조가 숭례문을 세운 그곳이 바로, 지금의 서울 도심 한복판인 남대문로 4가입니다. 정남 쪽에 들어섰기에 남대문이라는 별명이 있는 숭례문! 6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의 문을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을 굽어봤겠죠? 태조 시기 처음 만들어질 때는 자연석으로 쌓았기 때문에 다듬지 않은 돌들의 크기가 제각각이고 거칠었습니다. 이후 세종시기 숭례문의 틈새를 작은 돌들로 메웁니다. 또 비가 오면 무너져 내리는 토성을 모두 돌로 교체했죠. 조선 후기 숙종 시기에는 더 큰 보수 공사를 했는데 면은 평면, 변은 직선으로 다듬은 돌로 성벽을 쌓게 됩니다. 이렇게 조선의 왕들. 그리고 그 시기 살았던 사람들의 그 손때가 차곡차곡 묻어나면서 숭례문의 아름다움은 완성이 된 것이죠. 현존 도성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숭례문은 장중한 규모에도, 절제와 균형의 아름다움을 지녔습니다. 고려 시대 주심포식에서 조선 시대 다포식으로 넘어가는 전통 목조건축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기에 건축학적으로도 빼어나다고 할 수 있죠. 이러한 숭례문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역사 속 외국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1883년 조선을 방문한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입니다.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에 숭례문을 이렇게 묘사했네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조선의 도시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마술사가 빚어놓은 무엇처럼 내 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숭례문이 대문으로써의 기능을 못 했던 적이 있었죠. 바로 1907년, 일제강점기. 성벽이 허물어지고 전찻길과 도로가 나면서 숭례문 통행이 금지됩니다. 그 후 2006년 3월 3일, 100년 만에 숭례문이 개방되어 다시 상징적 서울의 대문 역할을 하게 된 것이죠. 아름다운 만큼 시련도 많았던 숭례문 ST 1592년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합니다. 보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흥인지문을 통해 들어온 왜군에 의해 도성은 함락됩니다. 1910년 숭례문 현판이 떨어집니다. 며칠 뒤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 합병되면서 그 운명을 다하게 됩니다. 이렇게 나라의 운명과 숭례문이 결부되어 회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숭례문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그런 의미겠죠? 그렇기에 숭례문의 안전은 선조들에게도 아주 소중했습니다. 숭례문의 현판을 한번 보시죠. 어? 이상합니다. 이 현판이 가로가 아닌 지금 세로죠? 아셨어요? 자 이게 왜 세로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이 바로 화재를 막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가로가 아닌 세로의 모습을 어? 이상하네? 이렇게 이상히 여겨 돌아가는 것이죠...자, 화마의 기, 화기를 누르기 위함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거의 숭례문에는 불귀신을 누르기 위한 비기가 하나 더 있었는데요. 방화수 역할을 했던 연못입니다. 지금은 매립되어 없는 그 연못의 이름은 ‘남지’였습니다. 남지는 일본 황태자의 방한 때 매립되어 사라지는 데요. 1910년의 일입니다. 화재에 대비하는 방화수의 역할과 관악산의 화기가 너무 센 것을 누르는 상징적 역할을 동시에 한 연못, 남지. 1628년 도화서 화원 이기룡의 그림 [이기룡필남지기로회도]를 통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27년 연못을 매립한 곳에 건물을 짓기 위해 기초 공사를 하던 때의 일이었죠. 공사를 하던 중 유물이 발견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청동용두의 거북’ 그 이름으로 불리는 이 유물. 2009년 2월 숭례문 화재 1주기를 맞이하여 개최된 전시회에서 ‘청동용두의 거북’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유물 내부에서는 지류 유물 1점이 발견되었는데, 한가운데에 불을 뜻하는 ‘불화’를 쓰고, 그 주변에는 팔괘 모양을 그렸습니다. 또 그 안팎으로 물을 뜻하는 ‘물수’를 여러 개 써넣었죠. ‘물수’와 ‘불화’.. 화기를 누르기 위한 상징적 장치 맞겠죠? 이처럼 민족이 소중히 여긴 숭례문 왕 역시 예외는 아니였습니다. 태종은 태풍으로 숭례문 일부가 무너지자 원인부터 찾습니다. 태종이 찾은 원인은 바로 ‘부실 공사’! 문제 많습니다, 이거.. 자 이 재난의 원인을 찾아낸 태종은 그럼 어떻게 했을까요? 이 책임자를요! 처벌합니다! 그것도 아주 엄중하게! 책임자를 찾아내 옥에 가두게 되죠. 옥살이에 그치지 않고요, 석방 후에는요, 스스로 잘못을 수습하도록 합니다. 백성들의 노역으로 만든 숭례문이기에! 엄중한 처벌을 내린 것이죠. 그리고 책임지라는 겁니다. 이렇게 조선을 지나 일제강점기! 우리의 숭례문은 그 비극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숭례문과 우리 민족은 운명공동체였죠. 정미 7조약을 맺은 1907년 일본의 왕세자가 한양을 오려 합니다. 왕세자의 방문에 숭례문 주변이 지저분하다며 성곽을 헐고요 새 길을 내요. 그 길이 지금의 ‘태평로’입니다.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는 이렇게 고스란히 숭례문의 양팔 격인 성벽에 새겨진 것이죠. 성벽이 허물어지면서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또 한 번의 비극이 있습니다. 바로 6.25 전쟁. 숭례문은 총격전의 무대가 됩니다. 이로 인해 숭례문의 문루 2층에 2곳, 문루 1층 중앙에 3곳, 문루를 받치고 있는 육축 왼편에 1곳 등이 아주 크게 훼손이 되죠.. 1962년 대대적인 해체 수리작업을 하는데요. 당시 각 분야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숭례문 해체 수리에 참여합니다. 목공사는 조선 궁궐 목수의 계보를 잇는 조원재 씨가 참여했고요, 석공사에는 드잡이로 유명했던 김천석 씨가 참여하죠. 이때의 공사 기록은 1966년에 ‘서울 남대문 수리보고서’로 간행이 됩니다. 6.25 전쟁 이후 숭례문의 부활은 우리 민족이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일상을 되찾았다! 이런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문화재의 수난은, 나라가 문화재를 돌볼 여유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소중한 것을 이처럼 무심하게 지나치니 당연히 국운이 다했다고 탄식할 만한 재난과 사건이 벌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겠죠. 시간 여행을 하듯, 역사 속 숭례문을 만나봤습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 있는 숭례문.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숭례문 방화 사건을 어떻게 기록 할까요? 보존 또한 안전에 포함되기에 문화재의 안전을 지키는 일은 더욱 이 섬세한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매년 2월 10일은 문화재 방재의 날입니다. 왜 2월 10일일까요? 바로 그 날이요 우리의 그 소중한 숭례문이 불에 타 버린 날이기 때문입니다. 숭례문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요. 전 정말 눈물이 이렇게 나더라고요.. 저렇게 사라지면 안 되는 건데... 늘 옆에 있어 줄 것이라 생각했던 숭례문의 일부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숭례문의 재난을 통해 우리가 배운 것! 무관심해서는 안 되겠다. 정기적인 점검과 재난 대비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재 보존과 보호. 우리의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사랑해주세요. 관심도 가져주십시오. 그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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