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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지 선생님의 역사 속 안전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역사 속 자연재해와 우리 선조들의 대처법을 알아봅니다.
영상대본

안녕하세요. 역사를 통해 안전을 쉽고 재미있게 알려드릴 안전한TV 이다지 선생님입니다 오늘은 가뭄과 홍수 등 역사에 기록된 자연재해에 대해 알아볼거에요~ 요즘은 자연재해에 대해 예방, 대응, 복구까지 단계별로체게적인 대책이 마련되어 있는데요. 그렇다면 옛날엔 어떻게 했을까요? 지금부터 제가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자! 오늘의 저와 함께 할 친구들을 소개해 드릴께요. 세종시 아름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아름초등학교 친구들~~! 오늘도 신나게 역사 속 이야기로 빠져 들어가 봅시다! 댓글도 써주시고, 질문도 많이 해주시길 바랍니다. 네~! <역사 속 안전>은 국민안전처 유튜브를 통해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방송을 보시는 누구나 역사에 대한 궁금증이나 질문이 있다면 유 튜브 라이브 채팅창을 통해 질문을 남겨 주세요. 제가 신속한 답변 준비하고 있을께요~ 여러분은 자연재해하면 뭐가 떠올려지나요? 가뭄, 홍수, 태풍, 우박 ! 이런 날씨 현상에 대한 재난이 가장 먼저 떠올려질 텐데요. 이러한 재난관련 역사 기록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인종이라는 왕의 명령으로 쓰인 역사책인데요~ 고구려 백제 신라는 어떻게 자연재해를 기록해 놓았는지 살펴볼까요? 고구려 민중왕 2년(45년) 5월에 국동지방(수도의 동쪽지방)에 대수가 지고 백성들이 기근에 빠지므로 창곡(倉穀)을 풀어 이를 구제하였다. 안원왕 5년(535년) 국남지방(평양 이남지방)에 대홍수로 200여명이 사망하였다. 먼저 고구려입니다. 가뭄과 홍수로 백성들이 사망했다고 기록해 놓았구요, 백제 다루왕 28년(55년) 봄, 여름에 한재가 들어서 죄수를 살피고 사죄(死罪)를 사면(赦免) 하였다. 무령왕 6년(506년) 봄에 병이 돌고 3월부터 5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오지 않아 천택 (川澤)이 모두 마르고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은 창곡을 풀어 이를 구제하였다. 백제 역시 가뭄, 홍수의 내용과 피해상황을 자세히 기록해놓았습니다. 신라 탈해이사금 19년(75년) 한재가 들어 백성들의 기근이 심하므로 창곡을 풀어 이를 구제 하였다. 일성이사금 12년(145년) 봄여름에 한재가 들었는데 남쪽지방이 특히 심하여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은 곡식을 그 지방으로 옮겨 이를 구제하였다. 자비마립간 12년(468년) 4월에 국서지방에 큰 홍수가 져서 민가가 헐어지고 떠내려갔다. 7월에 왕은 수재가 있는 주·군을 순행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성덕왕 6년(707년) 정월에 백성들이 많이 굶어 죽어 사람들에게 하루에 조곡 3말씩 7월까지 지급하였다. 신라도 마찬가지로 가뭄과 홍수에 대한 피해상황과 사망자를 기록해놓았는데요. 흥미로운 사실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모두 자연재해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백성에게는 곡식을 나눠주고 왕이 직접 현장으로 행차해 민심을 달랬다는 대목입니다. 옛날에는 이러한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하늘이 인간에게 나쁜 짓을 하지 말아라‘ 하고 경고를 하는 거라고생각했대요. 그래서 하늘을 달래고자 제사를 지내고 가뭄이 들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오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자연재해에 대한 공포와 시련을 잊게 하기 위한 일시적인 것일 뿐 본질적인 대책은 될 수 없었죠. 때문에 자연재해는 선조들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아주 큰 시련이었습니다. 왜냐, 지금이야 직업이 다양하지만, 예전엔 백성들 90%이상이 농사를 짓는, 농경사회였기 때문인데요. 당시 가뭄이 들어서 농사가 망하면, 나라의 경제가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해마다 풍년을 기원하며, 누구나 배불리 식사할 수 있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꼽을 정도였죠. 그래서 선조들은 농사에 영향을 미치는 날씨와 자연재해에그 누구보다도 관심이 높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일이 날씨를 기록해 훗날 농사에 대비하고자 하고자 했는데요. 하지만 아주 먼 옛날에 (1세기까지)는 자연의 변화가 신과별들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했대요. 그래서 점성술에 의해 날씨 예측했다고 합니다. 점성술에 의존해 날씨를 예측하고 또 이를 믿었던 사람들이 많아지자 점술가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예측이 잘 맞아야 사람들이 자신을 믿어줄 수 있도록 해야 했겠죠? 그래서 점술가들은 가뭄이나 집중호우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에 대한 적중률을높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한 일이 하늘과 별을 관찰하는 거였어요. 하늘의 해와 달 별 그리고 구름의 태를 보고 날씨를예측하고, 파악했는데요. 때문에 이 당시 사람들은 해와 달, 그리고 별자리와 하늘의 상태를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하늘 관찰 시설,뭘까요? 네 바로 첨성대입니다.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하늘을 관찰하는 시설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하늘을 관찰 하는 시설이자 우리나라의 천문학과 기상학의 높은 수준을잘 보여주고 있는 문화재이기도 합니다. 신라인들은 이 첨성대에서 주기적이고 체계적인 관측을 통해 32회의 혜성 관측 기록을, 29회의 일식 기록을 남겼다고 해요. 자 이렇게 2천년 이상 하늘을 살피고 관찰하면서 우리 선조들은 자연재해를 예방하고자 했는데요. 조선시대에는 좀 더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자연재해 방지책이 나오게 됩니다. 그 이야기 잠시 후에 전해드릴텐데요. 그 전에 여러분이 전해주신 댓글 소개해 드려볼게요~ 1. 농사에 대해 잘 몰랐는데 정말 중요한 거였군요. 2. 첨성대가 중요한 역할을 했군요. 신기해요. 3. 홍수하고 가뭄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조선의 500년 역사가 그대로 기록된 역사책이 뭔지 아시나요? 네 바로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우리의 소중한 국보입니다. 세계의 보물,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그 이전의 시대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를 기록해 놓았는데요. 세종 5년(1423년) ‘경상도 녹전(祿轉)을 조운(漕運)하는 때를 당하여 가뭄으로 말미암아 강물이 얕아져서 배들이 여울을 만나게 되면 통행하지 못하니, 여흥·음죽·이천·천령·지평·양근·광주 등지의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각기 물가에 사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여울을 파서 배가 통행하도록 하소서’ 세종 5년, 가뭄이 극심해 남한강의 물이 얕아져 배를 띄울 수 없어 경상도의 세금을 서울로 옮기 어렵기에 강바닥을 파는 공사를 건의하자는 기록이 있고요, 현종 4년(1663) 경상도에 가뭄이 극심해 상류의 물줄기가 거의 끊기면서 낙동강의 뱃길이 끊겼다 현종 5년(1664) 충청도 영동현의 용당천이 한 나절이나 흐름이 끊겼다 현종 4년(1663)에는 경상도에 가뭄이 극심해 낙동강의 뱃길이 끊겼고, 다음해에는 충청도 영동현의 용당천이 한 나절이나 흐름이 끊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가뭄의 기록은 3천여 건이 넘는데요. 이렇게 가뭄이 발생하면 임금은 임금대로, 관리들은 관리대로 자기의 소임을 다 했는지, 사치는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고 원한이 맺힌 사람들이 있나 살펴봤으며, 기우제를 지냄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자 했습니다. 기우제와 관련된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면 음력으로 4월에서 7월 사이에 매년 기우제를 올린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심지어 태종 재위 18년 동안에는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은 1403년 태종 3년 딱 한 해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기우제로만 가뭄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뭄을 대비하기 위해 하천과 강의 물을 저장하기 위한 저수지를 만들고, 물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방을 쌓았죠. 또 논과 밭에 물을 대는 물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을 물을 이롭게 쓴다고 해서 수리 사업이라고 하는데요. 선조들을 가뭄 극복을 위해 여러 수리 사업을 펼치고, 평상시에도 물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방의 수령들을 감찰했다고 합니다. 또한 전국적으로 농사에 관한 책과 농업 정책에 대한 정보와 기술을 받아들이려고 했어요. 중국과 일본에서 농사에 이용하고 있는 수차 즉 물을 끌어올리는 기구를 도입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고 합니다. 자, 이렇게 선조들은 기우제를 비롯해 다양한 방법으로 가뭄이라는 자연재해를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홍수나 태풍이 일어나면 어떻게 했을까요? 기우제와 반대로 비를 멈춰달라고 하는 제사를 지냈을까요? 맞습니다. 그 제사의 이름을 기청제라고 하는데요. 기청제에 관한 기록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에도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에도 나옵니다. 특히 고려사에는 현종 13년 ‘비가 그치지 않아 날이 개기를 빌었다‘라는 내용부터 정종, 문종, 숙종, 예종 등도 기청제를 올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시대 태조부터 철종까지 조사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을 보면 큰비는 283건, 큰물은 177건 홍수는 16건으로 나타났는데요. 큰비라는 항목이 많이 있었고 큰물이라는 표현이 홍수보다 월등히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홍수보다는 큰물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태종 7년(1407년) 5월 27일 ‘도성 내 개천이 큰비로 넘쳤다’ 세종 9년(1427) 6월 23일 ‘경상도 상주에 큰비가 내려 산사태로 7명이 죽고 43호의 가옥이 떠내려갔으며, 선산·의성·함창·군위 등 고을에서도 민가와 사찰들이 떠내려가거나 파묻혔다’ 내용을 살펴보면 홍수에 대한 조선왕조의 첫 기록은 이처럼 홍수와 산사태 피해를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세조 13년(1467) 5월 27일 ‘큰비로 한강이 넘쳐서 평지에서 물의 깊이가 30척(약 6.2m)이 되었고, 병조에 전하여 백성들을 옮기게 하였다’ 세조 13년엔 큰비로 한강이 넘쳐 평지의 물 깊이가 약 6.2미터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현재 한강대교를 기준으로 지정홍수 높이는 4.5m, 경계홍수 높이는 8.5m, 위험홍수 높이는 10.5m로 정해져 있는데요. 지금의 홍수 기준과 비교해 보면 당시 한강이 넘쳐 평지의 깊이가 6.2m나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홍수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서울의 광나루, 잠실 등지는 홍수가 발생하면 그야말로 물바다가 되었던 곳이었대요 하천이나 강물이 넘치는 것을 막아주는 제방시설이 제대로 갖춰있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지금처럼 한강변에 제방시설이 없었던 조선시대 때는 큰 비가 오면 한강변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을 겁니다. 숙종 43년(1717) 7월 12일 ‘팔도에 큰물이 졌으며 영남과 관동이 더욱 혹심하였고, 낙동강 일대가 모두 큰 바다를 이루었고 사람이 빠져 죽은 것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홍수로 인한 인명과 재산피해는 숙종 43년의 기록을 통해서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요. ‘팔도에 큰물이 졌으며 영남과 관동이 더욱 혹심하였고, 낙동강 일대가 모두 큰 바다를 이루었고 사람이 빠져 죽은 것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왕은 백성에 대해 결코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명종 2년(1547) 7월 3일 “금년의 수재는 팔도가 다 그러한 것이나, 이 장계를 보니 수백 년 내에 없었던 재변이다. 재변을 당한 곳의전답 피해와 빠져 죽은 사람 수를 자세히 조사하여 치계할 일을 감사에게 하유하라” 명종은 홍수로 인해 입은 재산피해와 사망자를 조사하는 명을 내려 민심을 헤아렸습니다. 아울러 지금의 사회복지법과 같은 비슷한 제도인 휼전을 통해 자연재해로 인해 생계를 잃은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태풍이나 홍수 등이 특별재난지역을 선포해 긴급구조에 나서고 있는데요. 휼전은 이와 비슷한 제도로 자연재해로 모든 것을 잃은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준다거나 세금을 낮춰준다거나 아픈 곳을 치료해준다거나 등의 다양한 지원을 제공해주는 제도였습니다. 아울러 조선을 대표하는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그가 쓴 책 <목민심서>에 <진황육조>를 통해 보다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재난구호체계를 마련합니다. 여기서 실학자란 실제 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은 연구하는 학자를 말합니다. 정약용은 백성들이 잘살고 나라가 튼튼해지는 방법을 연구해 백성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했던 분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목민심서를 통해 수령 즉, 백성을 돌보는 설명자막> 다산 정약용마을의 책임자 지켜야 할 것들을 알렸죠. 목민심서의 진황육조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 번째 하단자막> 진황육조 1. 비자(備資) 풍년에 곡식을 매입하고 미납세금을 우선 징수해 흉년을 대비한다. 비자라고 해서 자연재해를 대비하기 위해 풍년에 곡식을 매입하고 납부하지 않은 세금은 거둬들이고, 두 번째 하단자막> 진황육조 2. 권분(勸分) 부유한 사람들에게 권장하여 식량이 없어 고생을 하는 농민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이나 재물을 직접 나누어주는 일 자연재해 시 부유한 사람들을 설득해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직접 곡식이나 재물을 나눠주며, 하단자막> 진황육조 3. 규모規模 적정한 시기에 이재민을 구호하고, 규모를 정하여 이재민의 지원범위와 정도를 결정하는 것 세 번째 적정한 시기에 이재민을 구호하고 규모를 정하여 지원범위와 그 정도를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하단자막> 진황육조 4. 설시(設施) 구호에 필요한 일체 시설과 행정기구 및 구체적 시행방법 등을 의미, 가마솥을 갖추고 염장, 미역, 마른 새우 등을 준비하여 이재민 식량을 지원 네 번째로는 구호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춰 가마솥과 미역, 소금, 마른 새우 등을 준비해 이재민을 식량을 지원하고 다섯 번째로는 가뭄 시에는 논을 밭으로 바꿔 하단자막> 진황육조 5. 보력(補力) 논을 대신 밭으로 갈아 일찍이 다른 곡식을 파종하도록 하고, 가을이 되면 거듭 권하여 보리를 파종토록 하는 방식 등을 의미 다른 곡식을 파종하는 등의 농사법을 제시하고, 마지막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점검해 잘못된 점을 살피도록 했습니다. 하단자막> 진황육조 6. 준사(竣事) 처음부터 끝까지 점검해서 잘못된 허물을 하나하나 살핌 정약용이 이렇게 자연재해를 대비하기 위한 긴급구호체계를 마련했다면, 전 재산을 털어 몸으로 직접 재해현장을 공사해 강의 범람을 예방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시대의 판관 이서입니다. 판관은 관아를 이끌어 가는 벼슬 중 하나로 백성들의 민원도 받아주고, 관아의 행정업무도 맡는 말하자면 우리동네 구청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당시 대구에는 도심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큰 비가 오고 홍수가 나면 이 강이 범람해 대구 시내를 온통 물바다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구시내가 온통 물난리가 나자 관아를 이끌고 백성을 살펴야 하는 이서는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족이 생이별하고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연도 접하게 되죠. 그러자 그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신천에 둑을 쌓는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그런데 둑을 쌓으려면 인부가 필요하고, 흙과 돌도 필요하고, 흙과 돌을 옮길 기구와 장비도 필요한데요. 이서는 이러한 모든 경비를 자신의 재산을 털어 마련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강은 범람하지 않았고 백성들은 물난리 걱정에서 벗어났다고 해요. 후대에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고 지금도 대구에서는 이서를 기리고 있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대구에서는 신천이란 강이 범람했다면 서울에서는 청계천이 범람해 도성 안의 홍수 피해로 몸살을 앓는 경우가 빈번했다고 해요. 서울 도심 한복판 종로구와 중구를 가로지르는 10.84㎞의 하천. 홍수가 나면 하천이 넘쳐 집들이 떠내려가고 익사사고가 빈번하였음 청계천은 아주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개천으로 서울 광화문과 종로 일대를 흐르는 하천인데요. 경복궁과 아주 가까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큰비가 오거나 홍수가 나면 매번 물이 넘쳐나니 백성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죠. 때문에 태종, 세종대왕 시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영조시대에 와서야 본격적인 청계천 제방사업이 시작됩니다. 이 사업의 이름은 <청계천 준천 사업>이라고 하는데요. 홍수 피해 방지의 측면과 함께 서울로 유입된 도시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려는 1석2조의 목적이 있었죠. 영조는 재임 기간 중 준천 사업에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 백성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1752년에는 직접 밖으로 나가 준천에 대한 백성들의 의견을 물어보았고, 1758년에는 준천의 시행 여부를 신하들에게 물으면서 구체적인 추진 계획을 세웠죠. 아울러 공사 기간 동안 영조는 직접 나와서 공사를 독려하기도 하였으며, 공사가 완성되자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였습니다. 당시의 모습은 <준천계첩(濬川契帖)>에 네 점의 그림으로 남아 있고요. 이 그림에는 공사에 동원된 소와 수레, 쟁기 등을 비롯하여 영조가 신하들과 함께 친히 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모습이 생생히 나타나 있습니다. 영조에 의하여 추진된 청계천 준천 사업은 당시의 국가적현안을 백성들과의 소통을 통하여 해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영조는 서로 편갈라 싸우는 정치를 개혁도 했고,세금 개혁으로, 백성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면서 이런 공사까지 했다니 정말 서민군주라고 부를만 하죠. 진심으로 백성을 위하는 걸 국정의 최대 과제임을 인식하고 이를 실천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이 꼭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닌가 싶네요~ 조선시대 최고의 세종대왕 시절에는 자연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획기적인 기구들이 발명됩니다. 세종대왕은 홍수와 가뭄같은 재연재난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이 안쓰러워 이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당시 과학자들에게 명을 내립니다. 그 과학자 중에는 장영실도 있었지요. 조선 시대의 과학자. 간의, 혼천의 등 천체 관측기와 앙부일구, 자격루 등의 시계를 발명하였으며 측우기와 수표를 제작 장영실은 원래 부산 동래현 관청에 소속된 노비였어요. 중국인인 아버지가 조선에 귀화하여 기술직을 담당하였지만, 어머니는 천민인 생이어서 태어나자마자 천민 신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영실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고 그의 소문은 태종의 귀에까지 들렸어요. 태종은 그를 궁궐로 불러 공장에서 물건을 제작하는 일을 맡겼지요. 그 뒤 세종대왕이 과학 기구를 만들 기술자를 찾다가 장영실의 이름을 들었어요. 세종대왕은 장영실에게 벼슬을 주어 일을 맡기려고 했지요. 하지만 신하들은 장영실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생각은 달랐어요. ‘비록 천한 신분이라도 능력이 있고, 나라에 공로가 있으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다.’ 라고 하면서 장영실에게 벼슬을 내립니다. 덕분에 장영실은 다양한 과학기구를 발명하게 되죠. 그 중 하나가 세계 최초로 발명한 측우기입니다. 測 잴 측, 雨 비 우, 器 도구 기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 기구는 내린 비, 즉 강우량를 측정하는 도구입니다. 고인 빗물의 깊이를 재어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는데요. 측우대는 측우기를 일정한 높이로 올려놓기 위해 받치던 돌로, 바닥에 튄 빗물이 들어가 오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서양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하였다고 하니 우리나라 측우기가 서양보다 약 200년이 빨리 발명되었고 또 실생활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겠죠? 이 세계최초의 측우기 덕분에 각 지방마다 비 오는 시기가 달라 농사짓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백성들은 정확한 비의 양을 잴 수 있어 농사를 지을 시기를 예측할 수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홍수와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예방하고 나라의 중요한 행사 때 하늘의 상태를 예측하는 역할도 했답니다. 장영실의 또 다른 발명품 수표도 있습니다. 물 수, 기록하다 표 말 그대로 물의 수위를 재기 위한 표에요. 장영실은 청계천의 수위를 재기 위해 이 수표를 만들었는데요. 이 또한 측우기에 이어 세계 최초라고 합니다~ 수표의 눈금은 양면에 1자[尺]부터 10자까지 새겨져 있고, 또 3자·6자·9자의 선 위에 동그란 구멍을 내어 물이 부족하다는 뜻의 갈수, 물이 적당히 있다는 뜻의 평수, 물이 아주 많다는 뜻의 대수로 표시해 물의 상태를 알려주었습니다. 1자는 약 30.3센치를 나타내죠. 장영실이 발명한 수표는 지금의 하천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설치된 수위표와 매우 흡사하고 해요. 당시로서는 상당히 과학적인 발명품이었죠. 수표의 발명으로 조선은 청계천과 한강의 수위를 잴 수 있었고 덕분에 집중호우나 태풍 발생 시 하천의 범람을 예상해 재산은 물론 인명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과학의 천재를 미리 알아보고 신분에 상관없이 벼슬을 내렸던 세종대왕! 덕분에 우리는 좀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겠죠?! 이렇게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또 많은 많은 댓글이 올라왔습니다. 하나 씩 소개해 드려볼게요~ 1. 자연재해에 대비하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2. 측우기가 세계 최초라니~ 정말 대박입니다. 우리나라가 자랑스러워요. 3. 공부 열심히 해서 장영실 같은 과학자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저기 우리 아름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손을 들어 왔어요~ 질문 있나요? 1. 옛날에는 날씨가 안 좋으면 왕이 잘못해서 그랬다고 생각했다는데 그러면 처벌을 받는 왕도 있었나요? 2. 측우기나 수표 같은 과학기구는 중국이나 일본 같은 다른 나라에도 전파되었나요? 가뭄과 홍수는 예전에도 지금도 계속해서 발생되는 자연 현상 중 하나입니다. 대판자막> 재연재난 시 행동요령 1. 비탈면이나 산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곳은 가까하지 않는다. 2. 하수도로 물이 역류하면 전기차단기를 내리고 가스밸브를 잠근다 3. 물이 범람하면 자동차는 이용하지 않는다 4. 감전의 위험이 있으므로 흐르는 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5. 수돗물 등의 먹는 물은 오염 여부를 확인한다 그 중 집중호우로 인한 홍수는 산사태 일으키고 도로와 가옥, 건물에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는데요. 때문에 홍수로 인한 인명피해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중호우와 홍수라는 재난이 발생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나요? 우선 비탈면이나 산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지역에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수도로 물이 나오면 전기차단기를 내리고 가스 밸브를 잠가주고요, 자동차는 이용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감전의 위험이 있으므로 흐르는 물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며, 수돗물이나 먹는 물은 오염이 되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아쉽게도 벌써 여러분과 헤어질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과 함께 역사 속에서 자연재해를 극복한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봤습니다. 자연은 평소에는 온화하다가도 강풍이나 홍수, 태풍이나 가뭄을 일으키기도 하죠 하지만 인간은 이 자연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과학적인 시스템으로 미리 예측해 자연재해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비하고자 안전 훈련을 실시하고 안전수칙을 만들어 지키고 있는데요. 이렇게 삼박자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원활히 이뤄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미래를 지켜낼 수 있을 겁니다. 이상 여러분의 역사 선생님! 이다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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